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아폴론 유형과 디오니소스 유형 심리

내향성과 외향성의 유형 문제를 가장 분명하게 인식했던 인물은 시인 실러였다. 이어서 이 문제는 니체에 의해서 [비극의 탄생]에서 다시 새롭고 독창적인 방식으로 논의되었다. 니체의 초기 작품인 [비극의탄생]은 실러보다 쇼펜하우어와 괴테에 더 가깝다. 그러나 이 작품은 쇼펜하우어처럼 염세주의와 구원의 주제를 보임과 동시에 괴테의 "파우스트"와도 접촉점을 아주 많이 보이는 한편으로 실러의 헬레니즘을 공유하고 있는 것 처럼 보인다. 이 중에서 우리의 목적에 비춰 자연히 실러와의 연결이 의미하는 바가 가장 크다.

그럼에도 우리는 실러에게서도 단지 내용이 없는 유령 정도로만 인식되고 있던 동양의 지혜의 빛에 실체를 부여하려는 노력을 기울인 쇼펜하우어를 비켜갈 수 없다. 만약에 신앙과 구원의 확실성을 누리는 기독교인의 즐거움과 정반대인 것에서 나오는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를 무시한다면, 그의 해탈의 원칙은 쉽게 불교적인 것으로 보인다. 쇼펜하우어는 동양에 매료되어 있었다. 이 같은 사실이 당시 서양의 분위기에 대한 반작용이었을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것은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오늘날에도 다양한 운동에서 인도를 추구하는 쪽으로 지속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그런 반작용이다.

니체에게 있어서는 동양으로의 끌림이 그리스에서 멈추었다. 또한 니체는 그리스를 동양과 성양의 중간점으로 느꼈다. 역기까지 니체는 그리스를 동양과 서양의 중간점으로 느꼈다. 여기까지 니체는 실러와의 접점을 계속 유지한다. 그러나 그리스 인물에 대한 니체의 인식은 실러의 인식과 크게 다르다. 니체는 올림포스 산의 청명하고 금빛 찬란한 세상이 그려진 그 바탕의 시커먼 구석을 본다. 니체의 [비극의 탄생]의 한 부분을 보자.

"삶을 영위하기 위해, 그리스인들은 순전히 필요에 의해서 신들을 창조해야 했다. 그들은 생존의 공포와 무서움을 알았고 또 느꼈다. 그래서 어떤 식으로든 살기 위해, 그리스 사람들은 자신과 그 공포 사이에 꿈에서 탄생한, 빛을 반짝이는 올림포스 산이라는 세계를 끼워 넣어야 했다. 자연의 거대한 힘에 대한 무시무시한 불신, 무자비하게도 모든 지식을 혼자 독점한 운명의 신 모이라이, 인간의 위대한 친구인 프로메테우스의 독수리, 똑똑한 오이디푸스의 무시무시한 운명, 오레스테스가 자기 어머니를 죽이도록 몰아붙인 아트레우스 가의 저주. 이 모든 공포가 올림푸스 산의 공상적인 세계의 도움으로 그리스인들에 의해 새롭게 정복되거나 아니면 적어도 가려지고 있었다."

그리스인의 그 '차분함', 그러니까 헬라스(그리스의 옛이름)의 웃음꽃 피어나는 천국을어두운 배경을 숨긴 채 반짝거리고 있는 환상으로 본 그 통찰은 현대인에게 전해져 지금 도덕적 유미주의에 맞서는 주장을 펴고 있다.

여기서 니체는 실러와 의미 있을 만큼 다른 관점을 취하고 있다. 실러가 남긴, 미학 교육에 관한 편지들을 읽으면서 독자들은 그 편지들이 동시에 그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시도이기도 했다고 짐작할 것이다. 니체의 [비극의 탄생]에 오면 그런 짐작이 확신으로 변한다. [비극의 탄생]은 "대단히 개인적인" 책인 것이다. 실러의 경우를 보면 자신의 심리 안에서 "순진한" 면과 " 감상적인" 면이 갈등을 일으키고 있다는 점을 이해하고는 인간 본성의 배경과 깊은 나락에 속하는 모든 것을 배제하면서 빛과 그림자를 소심하게, 또 창백한 색조로 그리기 시작한다. 그런 한편 니체는 자신의 심리를 더 깊이 이해하면서 상반된 성향을 잘 포착하고 있다. 니체의 글은 실러의 상상력이 발산 하는 눈부신 아름다움에 조금도 손색이 없지만 여러 면에서 어두운 분위기가 강하다.

니체는 자신의 내면에서 작용하고 있는, 근본적으로 반대되는 성향을 아폴론 성향과 디오니소스 성향이라고 부르고 있다. 먼저 우리는 이 짝의 본질이 어떠한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이 목적을 위해 나는 니체의 글 중에서 니체의 작품을 잘 모르는 독자들도 스스로 판단을 내리고 또 나의 판단에 대해 비판할 수 있게 할 부분을 골라서 소개할 것이다.

"예술의 지속적 발전이 아폴론 유형과 디오니소스 유형의 이중성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논리적 추론만 아니라 직관의 즉시적 확신을 통해서도 지각했더라면, 우리는 미학을 위해 훨씬 더 많은 것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이다. 아폴론 유형과 디오니스 유형이 예술에 작용하는 것은 우리 인간이 일시적 화해만 있을 뿐 갈등이 영원히 이어지게 마련인 남녀의 이중성에 의존하는 것과 똑같다.

예술의 두 신인 아폴론과 디오니소스로부터 우리는 그리스의 세계에서 아폴론이 주관하는, 형상을 만드는 예술과 디오니소스가 주관하는 비형상인 음악 사이에 그 기원과 목적을 둘러싸고 격한 대립이 벌어졌다는 지식을 끌어낸다. 성격이 매우 다른 이 2개의 충동은 서로 어깨를 나란히 하며 달린다. 두 충동은 대부분 공개적으로 적대시하고, 그러면서 서로를 자극하여 새롭고 힘 있는 예술로 거듭 내어나도록 돕는다. 그렇게 함으로써 두 충동은 내적으로 적대의 성향을 영구화한다는 목적을 성취한다. 적대하는 두 충동을 서로 연결할 다리가 되어줄 수 있는 것은 오직 공통의 언어인 "예술"뿐인 것 같다. 그러나 마침내 그리스인의 "의지"의 형이상학적 기적에 의해서 두 충동은 서로 함께 짝을 이뤄 나타나게 되었으며, 이 짝짓기로부터 아폴론 성향과 디오니소스 성향이 똑같이 작용하여 아티카 비극의 창조라는 성과물이 나오게 되었다."

이 두가지 "충동"의 특징을 더 세밀하게 밝히기 위해, 니체는 이 충동들이 낳은 특이한 심리 상태들과 "꿈꾸기"와 "도취"의 심리 상태를 서로 비교하고 있다. 아폴론 성향의 충동은 도취와 비슷한 상태를 낳는다. "꿈꾸기"라는 단어로 니체는 기본적으로 "내향적인 상상력", 말하자면 "아름다운 꿈의 세상과 비슷한 것"을 뜻하고 있다. 아폴론은 공상이라는 내면 세계의 아름다운 환상을 통제하고 또 형상을 바꾸는 모든 힘들을 다스리는 신이다. 아폴론은 척도와 숫자, 제한, 그리고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적인 모든 것들의 정복을 의미한다. "아폴론을 개체화의 원리의 영광스럽고 신성한 이미지로 묘사할 수 있다."

한편 디오니소스 성향의 충동은 얽매어 있지 않는 본능의 해방, 동물의 구속되지 않은 활력의 자유로운 표출, 그리고 신성한 본성을 의미한다, 따라서 디오니소스 축제가 열리면 사람들은 사티로스로, 즉 상반신은 신이고 하반신은 염소인 그런 모습으로 나타난다. 디오니소스의 성향은 개체화의 원리를 무력화시키는 공포이며 동시에 그 원리의 파괴에서 "광적 환희"를 느낀다. 그러므로 다오니소스 성향의 충동은 개인을 집단적 본능과 요소로 해체하는 도취, 말하자면 고립된 자아가 세상을 향해 폭발하는 것과 비교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