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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자기 합리화를 하고 있지 않는가?

결혼해 사는 부부는 서로에 대해 예상했던 것보다 많은 것을 알 수밖에 없다. 

"결혼하기 전에는 두 눈을 크게 뜨고 결혼한 뒤에는 반쯤 감아라"라는 말이 있듯이 부부는 처음에는 하나로 결합하기로 한 자신의 결정을 정당화하고 나중에는 헤어지지 않고 함께 살아가는 것을 정당화한다. 집을 살 때 당신은 즉시 부조화를 줄이기 시작할 것이다. 친구들에게 그 집에서 마음에 드는 점(풍경,공간,고급스러운 창문)을 자랑하면서 문제점(낡은 주차장, 좁은 방, 외풍)은 되도록 축소하여 말할 것이다.

이 경우 자기정당화는 새로 산 아름다운 집에 대해 계속 좋은 기분을 유지할 수 있게 한다. 이 집에 반하기 전에 지질학자가 집 뒤의 절벽이 불안정하여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고 한다면, 당신은 그 정보에 감사하며 아쉽기는 하지만 결정을 철회할 것이다. 하지만 일단 그집에 반하여 감당하기 어려운 돈을 지불하고 내키지 않아하는 배우자와 함께 이사한 다음에는 정서적으로나 재정적으로 너무 많은 것을 투입한 후라 쉽게 포기하지 못할 것이다.

집과의 관계는 타인과의 관계에 비하면 단순하다. 집은 나쁜 주인이라고 해서, 혹은 집안을 청결히 하지 않는다 해서 당신을 비난할 수 없지만 힘든 하루를 보낸 당신의 등을 안마해주지도 못한다. 하지만 결혼은 대다수 사람들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양방향 결정이며, 부부는 결혼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엄청난 투자를 해야 한다. 결혼식 후 눈을 반만 뜬 채 서로의 긍정적인 면은 강조하고 부정적인 면은 간과하는 부조화 저감 방식은 결혼생활을 평탄하게 해준다.

행복해 미칠 지경인 신혼부부와 괴로움이나 따분한 속에서도 오랜 세월을 함께 살아온 불행한 부부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부조화 정보를 마음에 담아두는 것을 꺼리는 태도이다. 완벽한 짝과 결혼했음을 입증하는 증거를 추구하는 많은 결혼 새내기들은 그러한 기대와 달리 말썽이나 다툼을 경고하는 증거들은 애써 모른 척하거나 무시해 버린다.

오랜 세월 배우자의 잔인함, 시샘, 모욕을 참아온 불행한 사람들도 부조화를 줄이기 위해 분주하다.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평화 공존이라도 이루기 위해, 숱하게 다투면서 허비한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아까워 파국을 피하기 위해 대략 이런 말을 한다. 

"결혼생활이란 게 다 그렇지 뭐. 달리 어떻게 해볼 도리가 있으면 또 몰라. 좋은 점도 많잖아? 혼자 사는 것보단 힘들더라도 그럭저럭 사는게 낫다고 생각해."

자기정당화는 이득을 낳든 파국을 부르든 상관하지 않는다. 좋든 싫든 결혼생활을 유지해주기도 하고 끝내기도 한다. 똑같이 행복한 난관 속에서 출발하지만 해가 바뀌면서 어떤 부부는 더욱 가까워지고 정도 깊어지는가 하면 어떤 부부는 더 멀어지고 적대적인 방향으로 변하기도 한다. 어떤 부부는 결혼생활에서 위안과 즐거움의 원천을 영혼을 재충전할 장소를 개인으로서는 물론 부부로서도 성공적 삶을 뒷받침해줄 관계를 발견한다.

그러나 어떤 부부에게 결혼생활은 말다툼과 불화의 원천이자 침체를 불러일으키며, 개성을 파괴하고 그들의 유대를 깨뜨리는 관계이다. 우리의 목표는 모든 관계가 구원될 수 있다거나 구원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정당화가 어떻게 서로 다른 두 가지 결과에 기여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파국적인 사건이나 외도, 혹은 한쪽 배우자가 더는 참거나 그냥 넘길 수 없는 폭력 때문에 갈라서는 부부도 종종 있다. 하지만 헤어진 부부들의 절대 다수는 서서히 오랜 시간에 걸쳐 비난과 자기 정당화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갈라서게 된 것이다. 부부는 각기 상대의 잘못을 주시하며 자신의 기호, 태도, 행동 방식을 정당화한다. 그리하여 배우자가 비타협적 태도를 보이면 상대도 조금도 달라지지 않겠다는 결심을 더욱 굳힌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부부는 극단적인 견해가 몸에 배어 자기가 옳고 정당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러한 때는 서로의 감정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절실히 필요하지만 자기정당화 때문에 마음이 더욱 경직된다.

말을하고 있는 것은 실수를 했을 때나, 누가 상하수도요금납부를 잊었는가, 옛날 영화의 명장면에 대해 누구의 기억이 옳은가 등 비교적 사소한 문제를 두고 의견이 다를때, 누구나 사용하고 싶어 하는 일반적인 자기정당화가 아니다.

자기정당화는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우리의 인성을 보호하기 위한 보다 진지한 노력이며 거기에는 다음 두 가지 방식이 있다. '내가 옳고 당신이 틀렸다.'와 '내가 틀렸더라도, 어쩔 수 없다. 나는 그런 사람이니까.' 이다.

자신의 행위를 설명할 때는 자기정당화가 스스로를 추켜세운다.

잘한 일은 자기 공으로 돌리고 잘못한 일은 상황 탓으로 돌린다. 예를 들어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행위를 할때 "내가 이런 식으로 행동한 것은 내가 잔인하고 무자비한 사람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먼저 날 건드리잖아. 누구라도 나처럼 했을 거야." "달리 어찌 할 도리가 없었어." " 그래, 내가 험한 말을 했어. 하지만 그건 내가 아니었어. 술에 취해 있었거든." 등의 말을 한다.

성공적인 결혼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베푸는 관대한 태도를 배우자에게도 베푼다. 상대의 과실은 상황 탓으로 돌리고 상대의 사려 싶고 사랑스러운 행위는 그 사람의 공으로 돌리는 것이다. 배우자가 부주의한 행동을 하거나 심술이 나 있을 때는 그 사람의 잘못이 아닌 이러저러한 사건의 결과로 치부한다. "안됐어. 그이는 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는 거야." "그녀가 왜 내게 잔소리가 심한지 이해할 수 있어. 요통에 시달린 게 며칠째야?" 하지만 배우자가 특별히 근사

한 일을 했을 때 다른 배우자는 그 사람의 타고난 성품이나 인성 덕분으로 돌린다.

"그이는 특별한 이유가 없어도 꽃을 사줘요. 그런 남편이 어디 또 있겠어요?"

행복한 부부가 서로에게 유리한 해석을 하는 데 반해 불행한 부부는 정반대로 하고 있다. 배우자가 근사한 일을 하면 그것은 우연히 한 일이거나 상황덕분이다.

"그래요, 그이가 꽃을 사줬어요. 하지만 그건 단지 사무실 사람들이 전부 아내를 위해 꽃을 사니까 덩달아 산 것뿐이죠." 하지만 배우자가 부주의하거나 성가신 일을 했을때는 그 사람의 성격적 결함 탓으로 돌린다.

"그녀가 내게 딱딱거린 것은 워낙 심술쟁이기 때문이지."

암묵적 가설은 굉장히 중요하다. 무엇보다 그것이 부부가 다투는 방식뿐만 아니라 다툼의 목적 자체에까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어찌할 도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문제에 대해 지적을 받으면 부당하다는 느낌을 갖는다. 마치 키가 너무 작거나 주근깨가 있다고 해서 비난을 받는 것과 같은 느낌이다. 사회심리학자 준탱그니에 따르면 무슨 행위를 했는지보다는 어떤 사람인지를 두고 비난을 받았을 때 더 깊은 수치심과 무력감을 느끼며 그럴 때 숨고 싶고 사라져버리고 싶어한다. 수치심을 느낀 사람은 쓰라린 모욕감을 피할 길이 없으며 그 때문에 수치심을 느낀 배우자는 화를 내며 반격하는 경향이 있다. 

"당신은 내가 못되고 무능해서 끔직한 짓을 저질렀다고 느끼게 만든다. 나는 내가 못되거나 무능하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나를 모욕하는 당신이 못된 것이 틀림없다."

부부싸움이 더욱 악화되어 서로를 모욕하고 비난하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는 이미 다툼의 목적 자체가 변해 있다. 부부싸움은 더 이상 문제를 해결하거나 상대의 태도를 고치려는 노력이 아니다. 상대에게 상처를 주고 상대를 모욕하고 비난하려는 시도이다. 바로 그 때문에 모욕이 자기정당화의 노력으로, 타협의 거부로, 한 관계가 빚어낼 수 있는 가장 파괴적인 감정, 곧 경멸로까지 귀결되는 것이다. 

심리학자 존 고트먼은 700쌍이 넘는 부부를 수년 동안 추적한 연구에서, 경멸(빈정거림과 욕설과 비웃음으로 점철된 비난) 관계가 곤두박질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가장 강력한 징표임을 밝혀냈다.

이번 사례를 보자.

남편: 세탁소에서 내 옷 찾아왔소?

아내: (비웃으며)"세탁소에서 내 옷 찾아왔소?" 당신이 찾아와요. 내가 뭐, 당신 하녀라도 되는 줄 아세요?

남편: 절대 아니지. 하녀라면 최소한 세탁은 할 줄 알 테니까.

이처럼 경멸을 주고받는 대화는 파괴적이다. 자아가치감과 자신이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 존경받는 좋은 사람이라는 느낌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경멸이란 '나는 당신의 인격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배우자에게 최종적으로 폭로하는 것이다. 경멸이 이혼의 예고자라고 믿는데, 경멸이 갈라서고자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 아니라 경멸이 부부의 심리적 괴리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배우자가 '당신이 변하기를 기대해보아야 아무 소용 없다. 당신은 결국 똑같다.고 생각하고 있다.

화는 어떤 문제가 교정될 수 있다는 희망을 반영한다. 하지만 그 희망이 소진될 때 재로 남는 것이 원한과 경멸이다. 바로 그 때문에 경멸은 절망을 수반하는 것이다.

무엇이 문제인가? 부부 사이가 나쁜 것이 먼저인가, 서로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먼저인가? 내가 당신과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은 당신의 성격적 결함 때문인가, 당신에게 성격적 결함이 있다는 나의 믿음 때문인가? 명백히 이 문제는 양방향적이다. 하지만 대다수의 신혼부부는 처음부터 불평불만이 있었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심리학자들은 그들 중 일부는 내리막길을 걷고 일부는 그렇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를 오랜 시간에 걸쳐 조사할 수 있었다.

심리학자들은 대체로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비난하는 태도가 먼저이고, 그런 태도는 부부가 화를 내는 횟수가 한쪽의 우울함 같은 부정적 정서 상태와는 관련이 없음을 알게 되었다.

행복한 부부와 불행한 부부는 배우자의 행동에 대해 똑같은 상황에서 똑같은 행동에 반응할 때조차 매우 다르게 생각한다.

결혼생활을 파괴하는 가장 중요한 피의자가 자기정당화라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각 배우자는 상대의 행동을 특정 방식으로 설명함으로써 갈등과 짜증 때문에 생긴 부조화를 해소한다. 그 설명에 따라 피라미드에서 어느 한 길로 내려간다. 모욕과 비난의 길로 내려오는 사람들은 결혼생활 이야기를 다시 쓸 것이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점점 강도 높은 비관이나 경멸심을 뒷받침해줄 새로운 증거를 찾으려 한다. 처음에는 결혼생활의 부정적인 면들을 최소화하려 했지만 이제는 그것들을 과장하면서 사소한 것이라도 새로운 이야기를 뒷받침하는 증거를 놓피지 않으려 한다. 남편이나 아내가 동정적인 친구들과 함께 이야기를 자꾸 반복함으로써 새로운 이야기가 틀을 잡아가면 처음에 사랑의 감정을 불러일으켰던 특성, 상대의 좋은 면들은 봉지 않게 된다.

성공적인 결혼생활에서는 대립, 견해 차이, 상충된 습관, 성난 다툼까지 새로운 것을 배울 기회를 제공한다.

그리고 자신의 능력과 한계에 대한 믿음을 점검하지 않을 수 없게 함으로써 부부를 더 가깝게 만들어준다. 그것이 항상 쉽지는 않다. 과실을 덮어주고 마음대로 하고 싶은 욕망을 지켜주고,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끼치는 피해를 과소평가할 수 있게 도와주는 자기정당화를 버리는 것은 당혹스럽고 고통스러울 수 있다. 자기정당화가 없으면 후회와 상실감으로 가득한 풀장에 벌거벗고 서 있게 될지 모른다. 

그런데도 그 혜택을 따져보면 그것은 충분한 가치가 있다. 자기 정당화를 포기하는 것이 몹시 고통스럽더라도 그 대가로 자신에 대해서 중요한 것을 배울 수 있고, 통찰과 자기수용의 평화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꼭 결혼 생활이 아닌 연인과의 관계에서도 모든 사람들의 관계에서 나는 자기정당화를 주장하고 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