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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가해자고 누가 피해자 인가?

외도한 사실을 털어놓고 1년뒤, 그는 그녀의 화가 조금도 풀리지 않은 것을 알았다. 모든 대화가 결국 그 일로 귀결되었다. 그녀는 그를 항시 주시했으며 그가 그녀의 시선을 느끼고 바라보면 그녀의 표정에는 의심과 고통이 가득했다. 그는 괴로웠다. 그녀는 그 일이 작은 실수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것인가? 세상 남자 중에 나만 그런 잘못을 저지른 것도 아니지 않은가. 어쨌든 그는 그 일을 솔직히 털어놓았고, 관계도 완전히 청산했다. 나는 사과를 했고, 그녀를 사랑한다고, 계속 함께 살기를 원한다고 몇 번이나 말했다. 그녀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 걸까? 우리 결혼생활에서 좋은 부분에만 초점을 맞추어 이 어려움을 극복하면 안 되는 것일까?

그녀는 그의 태도를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외도를 고백하고 관계를 청산했다고 해서 치하라도 바라는 모양으로 애초에 그런 일을 벌인 것에 대해 비난을 들을 생각은 없는 듯했다. 그는 그것을 모르는 걸까? 나의 고통과 번민에 초점을 맞추어 자신을 정당화하기를 그칠수 없는 것일까? 사과를 한 적도 없지 않은가? 미안하다고 말은 했지만 그걸로는 부족하다. 그는 왜 내게 진심 어린 사과를 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에게 항복을 받아낼 생각은 없다. 단지 그가 내 감정을 알아주고 보상을 해주길 바랄 뿐이다.

하지만 그는 그녀가 심하게 화를 내고 있어 그녀가 원하는 보상을 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그런 만큼 오히려 보복을 하고 싶은 심정이다. 그녀의 분노에서 그가 듣는 메세지는 '당신은 끔찍한 죄를 저질렀어.' 와 '당신이 내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당신은 인간도 아니야.' 이다. 물론 그는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에 대해 정말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녀의 기분을 풀어줄 수만 있다면 온 세상이라도 주고 싶은 심정이지만 끔찍한 죄를 저질렀다거나 인간도 아니라고는 생각하지 않으며, 그녀가 원하는 것처럼 비굴한 사과는 할 마음이 없다. 그래서 그 일이 별것 아니었으며 상대 여성이 별 의미 없었다고 그녀를 설직하려 했다. 그러나 다이앤은 그 일을 설명하고자 하는 짐의 노력을 그녀의 감정을 돌리려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의 반응에서 그녀가 듣는 메세지는 '당신은 그렇게 화를 내면 안돼. 내가 무슨 나쁜 짓을 했다고 그래?.' 였다. 자신을 설명하려는 그의 노력은 그녀를 더욱 화나게 했고, 그 화 때문에  그는 그녀의 고통을 같이 느끼고 반응하기가 더욱 어려웠다.

그는 하려면 할 수 도 있었겠지만, 아내로서 못되게 굴어서 어쩔 수 없이 외도를 하게 되었다고 주장하는 식으로 책임을 전가하려 하지 않았다. 허물이 있는 쪽이 자꾸 변명하고 자기정당화하며 서둘러 부정하더라도 허물 있는 쪽이 누구인지가 확실한 때도 있다.

사람들이 자신의 삶, 사랑, 상실을 정당화하기 위해 지어내는 모든 이야기 가운데 불의나 위해를 가하거나 당한 연유를 설명하기 위해 지어낸 것들이 가장 강력하며 그 영향도 가장 머리 미친다. 그런 경우에 자기정당화는 상대(배우자,부모,자식,친구,이웃,국민)와 다툼의 내용(외도,가족유산,배신,소유지경계선,군사적침략)을 가라지 않는다. 우리는 누구나 지금까지 다른 사람들이 화날 행동을 해왔으며 지금까지 다른 사람들의 행동에 자극받아 화를 냈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다른 사람들에게 영원히 우리를 악인, 배신자, 불한당으로 여길 상처를 주었다. 우리 모두 부정행위라는 바늘에 찔리는 아픔을 겪었으며 그 상처는 결코 완전히 아물 것 같지 않다.

자기정당화에서 놀라운 사실은 경험에서 얻은 교훈과 상관없이 눈 깜짝할 사이에 한 가지 역할에서 다른 역할로 옮겼다가 다시 돌아 올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다 한 상황에서 부정행위의 피해자같이 느낀다고 해서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부정행위를 할 가능성이 줄어들지는 않으며 피해자들에게 더 동정적인 태로를 갖게 되지도 않는다. 마치 두 가지 경험 사이에 벽이 있어서 이편에서는 저편을 볼 수 없게 막고 있는 것 같다.

벽이 생기는 한 가지 이유는 고통의 양이 실제로는 같더라도 자신이 당한 고통이 남에게 가하는 고통보다 항상 크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남의 다리 부러진 것은 사소한 일이고 내 손톱 부러지는 것은 중대사' 라는 옛말은 사실 신경회로망의 원리를 정확히 묘사하고 있다.

영국의 신경하자들은 '받은 만큼 되갚기' 실험을 하면서 실험자들에게 두 사람씩 짝을 짓게 했다. 각각의 쌍에서 한 사람에게 기계장치로 검지에 일정한 압력을 가한 후 방금 자신이 느낀 것과 똑같은 압력을 상대의 손가락에 가하라고 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동일한 힘을 가할 수 없었다. 자신이 받은 만큼의 압력을 가한다고 생각하면서 실제로는 상당히 더 큰 압력을 가했다. 연구자들은 이와 같은 고통의 악순환이 신경계 정보처리의 자연스러운 부산물 이라고 결론 지었다.

가해자들은 종지부를 찍고 빨리 잊고 싶을지 모르지만 피해자들은 오랫동안 잊지 않는다. 게다가 가해자들은 자신의 행위가 당시에 이해할 만한 것이었다고 생각한 반면 많은 피해자들은 가해자의 의도를 사건이 일어난 지 오랜 뒤에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왜 그랬는가?'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가해자의 동기를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이야말로 피해자 의식과 피해자 이야기의 중심적인 특징이다.

'그는 끔찍한 짓을 한 것만이 아니다. 그것이 끔찍한 짓이라는 것을 이해조차 못한다!'

'그녀는 왜 자신이 내게 가혹하게 대했다고 인정하지 못할까?'

그가 이해할 수 없고 그녀가 인정하지 못하는 한 가지 이유는 가해자가 자신의 소행을 열심히 정당화하고 있다는 것이지만, 또 다른 이유는 피해자의 감정을 정말로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많은 피해자들이 처음에는 화를 억누르고 상처를 살피며 어떻게 할지 곰곰이 생각한다. 그들은 자신의 고통이나 불만을 여러 달 동안, 더러는 여러 해나 수십 년 동안 되새긴다.

한 남자의 예를 들어보자. 결혼해서 18년 동안 함께 살던 아내가 느닷없이 아침 식사 시간에 이혼하자고 요구했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난 내가 무얼 잘못했는지 생각해내려고 애썼고, 그녀에게 보상하고 싶다고 말했지만, 침대 밑에는 18년이라는 세월이 쌓여 있었다.' 아내는 18년 동안 속을 끓이고 있었던 것이다. 

가해자들은 벌써 종결짓고 잊은 사건들을 피해자들이 자신의 고통과 분노를 표출할 때 가해자들은 당혹스럽다. 대다수 가해자들이 피해자의 분노가 과잉반응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는 피해자는 거의 없다. 피해자들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 '과잉반응? 하지만 난 이 말을 하려고 여러 달 동안 생각했어. 그정도는 과소반응이야!'

이렇듯 많은 피해자들이 자신의 감정을 해소하지 못하는 것은 상처에 앉은 딱지를 계속 떼어내기 때문이다.

개인이든 국가든 가해자는 자기행위를 정당화하는 역사를 쓴다. 그 행위는 상대편의 자극을 받아 일어났고 사리에 맞고 의미가 깊었다. 비록 자기 쪽이 잘못을 했거나 지나쳤을지라도 지나고 보니 차라리 잘 된 일이었고, 어쨋든 지금은 다 지난 일이다. 하지만 피해자들은 똑같은 사건을 두고 전말을 달리 설명하는 역사를 쓴다.

그들은 가해자의 행위를 독단적으로 무의미한 것으로, 또는 악의적이고 잔인한 의도에서 출발한 것으로 그린다. 반면 자신의 앙갚음은 전적으로 적합하고 정당한 것으로, 지나고 보니 오히려 잘 된 일이 아무것도 없는 것으로 그린다. 사실 모든 것이 잘못되었으며, 지금도 그 일만 생각하면 화가 난다.

바로 그 때문에 역사는 승자가 쓰지만 회고록은 피해자가 쓰는 것이다.